지옥 같은 전쟁통에서, 천국을 선사했던 커피 한 모금
‘이 곳에서 모든 것은 혼돈이다. 긴장감은 이루어 말 할 수 없다. 배급량은 4분의 1로 줄었고, 커피마저 없다. 커피가 없다면 계속 전쟁하기 힘들 것 같다’
(1865년 4월, 북군 병사 에베네저 넬슨 질핀(Ebenezer Nelson Gilpin)
보통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전쟁은 ‘지옥’이라겠지만, 그 지옥속에서 살아남기위해 싸웠던 미국의 군인들에게 커피는 아주 작은 ‘구원’이었다. 한 해외매체에서 미국이 참전했던 남북전쟁, 베트남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복무한 군인들에게 커피가 어떤 의미인지 알아보는 기사를 다뤘다.
남북전쟁
‘전쟁·자유·노예제도·독립·연합…’ 이러한 단어는 참전 군인들의 다이어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스미소니안 박물관의 미국사 큐레이터인 존 그린스펀(Jon Grinspan)은 남북전쟁 기록 보관소의 자료 연구결과에서 "아침에 마셨던 커피나 아침에 마시고 싶은 커피에 대한 내용이 많았다”고 말했다. 실제로 당시 기록물 중 커피라는 단어는 ‘전쟁’, ‘총알’, ‘대포’, ‘노예’, ‘링컨’ 보다도 많이 쓰였다.
1년에 36파운드(약 16kg)의 커피를 받은 북군 병사들은 가능한 모든 도구들을 활용해 매일 마실 커피를 만들었다. 이를 위해 주변에서 얻을 수 있는 물-물통/물웅덩이에서 얻은 물, 염분이 섞인 물, 그리고 미시시피 진흙, 그들의 말들 마저 마시지 않을 정도의 물-이 제한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 기회가 될때마다 커피를 마셨다고 한다. 반면에 남군 병사들은 북군이 항구를 봉쇄하면서 커피 수입이 단절되어 북군보다는 적은 커피를 마실수밖에 없었다.
‘남군은 담배와 남부 음식을 얻을 수 있었고, 북군은 커피를 얻을 수 있었죠.’
뉴욕의 뉴스쿨에서 식품학과 교수이자 ‘스타링 더 사우스: 북 측이 남북전쟁에서 어떻게 이겼을까’의 저자인 앤드류 F.스미스는 "전투가 일어나지 않을 때 남군들과 북군들은 전쟁터 중간에 만나서 물물거래를 했다"고 말했다. 부족한 커피를 보충하기위해 남부 군인들은 호밀·쌀고구마·비트를 초콜릿색이 날 때 때 까지 로스팅을 한 대용커피를 마시기도 했다.
베트남 전쟁
남북전쟁 땐 북군에게 큰 원동력이었던 커피는 100년 뒤인 베트남 전쟁때는 반전운동의 아이콘이 되기도 했다. 1960~70년대 초, 베트남 파병을 마치고 돌아온 군인들은 베트남전에서 미국의 역할에 대해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GI커피하우스들은 전국적으로 생기면서 중요한 반전 모임장소로 사용됐다. 1970년대 초 텍사스, 킬린 인근 포트후드에서 GI커피하우스 'An oleo strut'를 운영하는 것을 도운 데이비드 자이거(David Zeiger)는 “미국 군인들이 군대에서 벗어나 자신이 느낀 바를 말하는 장소였다”고 말했다. 영화제작자인 제이거는 2005년 ‘Sir, No Sir’라는 GI 전쟁 반대 운동과 'An oleo strut'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첫 GI커피하우스
UFO라 불리었던 첫 GI커피하우스는 1957년 콜롬비아 포트 잭슨에서 오픈했다. 이곳은 1963년도에 예비군으로 지원했던 하버드 졸업생인 Fred Gardner이 오픈한 이 커피하우스는 군 장교들을 걱정하지 않고도 걱정과 짜증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곳이었으며, 흑인·백인·학생·군인들 모두가 함께 즐기고 함께할 수 있는 특별한 장소가 됐다. 이후 1971년까지 GI커피하우스는 포트루이스, 워싱턴 타코마 등 24개로 늘어났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군대는 커피에 의해 유지되며, 이것은 하나의 의식과 같습니다.” (Harrison Suarez, co-founder of Compass Coffee in Washington, D.C)
콤파스 창업자인 수아레즈와 미셀 해프트(Michael Haft)는 “해병대에서 복무하면서 커피로 친구가 되는 한편, 지도와 콤파스로 방향을 잡는법을 배웠다.”고 말했다. 해병대 캠프 훈련캠프 첫날에 “이봐 황마포, 커피마시러 갈래?”하고 말했던 기억도 있다고 전했다. 이것들이 그들이 우정을 쌓는 방법이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격해지며, 같은 부대에 배치된 수아레즈와 해프트는 아프가니스탄 현지 군인들과의 유대감을 높이기 위해 커피를 사용했으나 실패했다. 아프가니스탄은 차 문화 중심 국가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현지 문화를 이해하며 존중해주는것도 중요하기에, 커피 대신 컵 안에 각자의 음료를 담아 함께 모여 마셨다. 수아레즈는 “함께 지내는 동료와 유대감을 쌓아가는 과정은 음료의 종류와는 상관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미국 군인들에게 원동력이 되었던건 역시 커피였다. 소대장들은 모닝 커피를 함께 모여 마시면서 하루 계획을 얘기하는게 일상이 됐다. 100년 전의 전쟁때와 마찬가지로 커피는 ‘전쟁의 의식’이었던 것이다.
해프트와 수아레즈가 미국으로 돌아왔을 때, 커피에 대한 그들의 집착은 더해졌다. 그는 “전쟁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공허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무언가에 빠지게 되는데 우리에겐 그것이 커피였다”고 말했다. 최고의 커피를 위해 브루잉하고, 연구하고, 탐구하는 과정 덕분에 그들은 책을 집필할 수 있었다. 결국 워싱턴 DC에서 로스터리와 커뮤니티 모임 장소가 된 콤파스 커피도 진행됐다.
“ 남북전쟁으로 돌아가 아프가니스탄에서 우리가 경험했던 것, 사람들이 함께 모이고, 경험을 나누고, 커피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공통 분모들이 당신이 가지고 있는것이나 마찬가지에요” 라고 수아레즈는 말했다.
*Source: If War Is Hell, Then Coffee Has Offered U.S. Soldiers Some Salvation